소확세
소확세

인류애와 가족애 사이에서 –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의 첫걸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은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의미가 애매하거나 기준이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횡성 한우’입니다. 최근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소확횡”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소고기는 확실히 횡성 한우다”라는 뜻이지요. 횡성 한우는 맛과 품질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지만, 정작 “횡성 한우가 어떤 소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 횡성 한우의 정체성과 사람의 정체성

농수산물 원산지 표시법에 따르면, 소를 “1년 이상 횡성에서 키우면” ‘횡성 한우’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을 생각해 보면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 정읍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10년을 자란 소를 횡성으로 데려와 1년을 키운 뒤 도축하면?
  • 법적으로는 이 소가 ‘횡성 한우’가 됩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과연 합리적인 걸까요? 소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자라왔는지를 따지지 않고 마지막 1년의 장소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시각일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은 곧 인간의 정체성 문제로 이어집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10년을 살다 서울로 이사해 10년을 산 사람은 “강원도 사람”일까요, “서울 사람”일까요? 경상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다가 전라도에서 30년을 산 사람은 “경상도 사람”일까요, “전라도 사람”일까요?

사람의 정체성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지, 혹은 어느 지역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로만 단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강원도 사람’, ‘서울 사람’, ‘지방 사람’ 등 다양한 꼬리표를 붙이며 사람을 구분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꼬리표가 때로는 특정 지역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편견, 혐오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낙인이 만드는 갈등, 그리고 마음의 감옥

우리는 사람을 쉽게 규정짓는 말을 사용합니다.

  • ‘강남 사람’ vs. ‘강북 사람’
  • ‘서울 사람’ vs. ‘지방 사람’
  • ‘경상도 사람’ vs. ‘전라도 사람’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지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낙인으로 작용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높이고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협소한 잣대를 들이대며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좁은 마음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역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3. 전쟁과 국가주의 – 인류애가 사라진 자리

2022년에 발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부른 비극입니다. 인류애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는 수많은 희생을 낳았습니다.

이 와중에 한 장면이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 우크라이나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파벨 베르니코프와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라나 마카로바 부부가 전 세계를 돌며 평화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국적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들의 연주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낳는 전쟁의 무의미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4. 세계시민주의의 이상과 허상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우리에게 편협한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벗어나라고 촉구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계시민이오!”

하지만 세계시민주의 역시 이상만큼이나 허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똑똑똑(Knock at the Cabin, 2023)》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 한 가족이 오두막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가족 중 한 명을 스스로 죽이면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이 극단적인 설정은 세계시민주의가 요구하는 선택의 본질을 묻습니다.

  • 내 가족 한 명의 생명과 전 세계 70억 명의 생명, 무엇이 더 소중한가?
  • 나는 내 가족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시민주의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가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5. 하나님이 감당하신 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

다행히도 우리에게 영화 속과 같은 선택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세계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6. ‘소확세’: 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

강남순 교수는 저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코즈모폴리턴 정신이란 곧 소외된 주변인들을 향한 예수의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배우는 것이다.”

거창한 계획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동입니다.

  1. 매일 만나는 사람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기
  2.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3.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내 가족처럼 귀히 여기기

바로 이것이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입니다.


7. 성찰의 질문

세계시민주의는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십시오.

  • 나는 사람을 지역이나 출신, 배경으로 쉽게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 나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동일한 시민”(에베소서 2:19)으로 대하고 있는가?
  • 나는 사회의 주변인과 약자를 내 가족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 나는 ‘지극히 작은 자’(마태복음 25:40)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찰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인류애를 실천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8. 인류애와 가족애의 균형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심지어 혐오로 이어질 때는 문제입니다. 반대로 인류애를 말하면서 내 가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강요도 옳지 않습니다.

인류애와 가족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그것이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선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실천으로 ‘소확세’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존중하고, 주변인을 향한 예수의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9. 여러분은 오늘 어떤 ‘소확세’를 실천하시겠습니까?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 주세요.
당신의 작은 선택이 이 세상을 조금 더 넓고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